코로나 시기가 아니었더라면, 기획 문서를 좀 더 꼼꼼히 뜯어보고 구체화하는 상상을 하는 데 더 시간을 들이지 못했을 겁니다. 저는 작가 겸 기획자로 활동하고 있는데, 창작 활동이 뜸해지며, 기획을 다른 때보다 더 마음껏 펼치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대면 교류도 뜸해지고 갇혀 있는 답답함과 지루함을 기획 아이디어에 쏟아 부어 기획 작업을 마치 창작 활동처럼-소설 쓰듯-했습니다. 노트북 앞에 앉아 상상의 나라를 너무 크게 펼치는 바람에, 실제 발표 기간에는 원래 코로나 퍼지기 전 계획했던 것보다 일이 두 배 가까이 커졌습니다.

연초에는 예측할 수 없는 감염병 확산으로 취소되는 일정, 미뤄지는 공모 등으로 2020년의 기획 및 작업에 걱정이 많았는데, 코로나19 시기에 맞춰진 지원사업이 다수 떴고, 다행히 190시간에 선정되었습니다. 덕분에 이 고립의 시간을, 배움의 시간으로 적극 활용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자료를 찾고, 큐레이팅은 무엇일까 등의 크고 작은 궁금증과 고민을 바탕으로 공부하며 기획 아이디어를 풀어나가며 기획해볼 수 있는 시간적·경제적 도움을 받았습니다.

2019년 말부터 총괄 기획으로 참여한 인디아트홀 공의 ‘지구인을 위한 질병관리본부’ 단체전에서도 작가진과 함께 비대면과 문서로 소통하며 협업을 하는 과정이 있었고, 보다 깔끔하게 회의에 초점을 맞춰, 화상 통화, 온라인 문서로 주고받으며 밀도 있는 기획자와 작가 간의 협업을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해외에서 참여한 작가님과도 (국내에 계신 작가님들과의 실제로 만나는 것이 어려웠기에) 온라인을 통한 소통으로 장소적 제약 없이 교류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코로나19가 막 창궐한 상반기에는 여름의 단체전 외에는 별다른 일정이 잡히지 않았고, 집에 머물러 기획과 구상에 쏟는 시간이 상당히 늘어났습니다. 시간적 여유가 늘어나며, 전시 기획에서 파생된 작업 아이디어를 ‘병과 식탁’ 다원 퍼포먼스 시리즈로 전시와 함께 확장해 풀어내게 되었습니다.

집중할 수 있는 시간과 여유가 반강제적으로 주어졌지만, 이를 잘 활용해 자양분을 쌓으며 기획 역량을 키울 수 있는 배움의 기회로 삼았다고 생각합니다. 서울문화재단의 190시간의 도움도 코로나로 끊어진 일에 대한 경제적인 불안감을 덜어주어 가능했다고도 생각됩니다. 일도 없었고, 지원금도 없었더라면 ‘구해지지 않은 일, 더 확산되는 코로나’에 대한 걱정과 불안감을 안고 코로나 블루에 무기력하게 시달렸을 듯합니다.

기획이란 계획과 구상, 아이디어를 짜내는 일이며, 실상 풍부한 배경지식과 리서치를 통한 아이데이션이 필요하고, 이 계획을 실현하는 데도 많은 에너지가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획 업무에 대한 가치를 인정하고 이를 보상하는 방안이 상대적으로 미흡하다고 생각됩니다. 이는 기획이 중요성을 알면서도, 무형의 아이디어, 비물질이라는 특성 때문에 보상되는 가치 책정을 잘 하지 않는 사회적 습관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특히 독립 기획자는 더욱더 스스로의 노동과 가치를 인정받거나 주장하기 어려운 위치입니다. 발표에 초점이 맞춰진 지원사업에서 실제 진행비를 집행하고 나면, 기획자에게 책정할 인건 사례비가 넉넉하지 않거나 없습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재단 지원사업에서 지원자 당사자(대개 기획자 또는 작가)에 대한 본인 사례비 책정이 불가능했던 적도 있습니다.

저는 그래서 190시간 기획자를 위한 지원이 더 반갑습니다. 뭐든 일의 시작과 발화의 지점에서 많은 일을 하는 역할인데도, 그 가치가 제대로 인정되지 않았던 부분을, 190시간 지원사업이 인정해 주고 지지해 주는 느낌입니다. 코로나19로 기획자를 위한 지원사업이 처음 시도되었지만, 그전부터 당연히 있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190시간 이후에도 작가 또는 창작자에 초점을 맞춘 지원사업과 별개로, 기획자를 위한 여러 프로그램 및 지원사업이 생겨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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